가을이 되면 가을을 타기도 합니다. 괜히 울적하고 외롭고... 일조량이 줄어서라고 하지만, 생각해보면 외로움이나 고독감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가을에만 국한된 정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인간의 고독을 생각해보면 인간의 실존까지 생각에 다다르기도 합니다. 그래서 가을을 맞아 이번 글에서는 인간의 실존과 연관된 중요한 이슈들에 대하여 생각해봤으면 좋겠습니다.
실존주의 상담가인 “얄롬”은 “죽음”, “고립”, “무의미”, “자유”를 인간 실존의 중요한 이슈로 제안합니다. 이것들은 무겁게 보여서 피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슈는 우리에게 지속적으로 중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죽음만 해도 애써 생각하기 꺼려지지만 우리 모두는 죽음과 직면할 수 밖에 없습니다. 멀고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마주치다 결국에는 자신의 죽음을 만나게 됩니다. 평소 죽음에 대하여 나름대로 이해하고 수용하고 있다면 조금이라도 더 죽음에 의연하게 대처하고 잘 준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듯 인간의 실존과 연관된 중요한 이슈에 대하여 당당하게 직면한다면 우리의 삶은 더 풍요로워질 수 있습니다.
죽음이란 주제는 우리를 불편하게 할 수도 있고 불안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은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자명한 사실입니다. 따라서 얄롬은 죽음을 부정하는 것은 자기기만이라고 하며 죽음에 직면할 것을 역설합니다. 그는 죽음의 공포를 냉철히 마주하여 남은 삶의 매 순간이 소중함을 알고, 살아 있음에 대한 순수한 기쁨을 즐기며, 자신과 타인을 위해 더 열정을 발휘하길 바란다고 합니다.
가끔 저는 때때로 삶의 순간 순간이 버겁고 피곤하지만, 이러한 순간이 지나가다 보면 20대가 훌쩍 떠나가버린 것처럼 30대도 지나 가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을 합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 다시금 마음을 다 잡고 주어진 삶을 더 충실하게 살려고 합니다. 저의 시야는 30대 정도에 머물러 있지만 얄롬의 관점은 남은 삶 전체를 보도록 합니다. 죽음을 바라본다는 것은 결국 남은 생을 헤아리는 것 같습니다. 저의 소중한 삶이 짧으면 몇 년, 길면 몇십 년 밖에 안남았다는 사실은 다시금 저를 각성시킵니다.
고립에는 개인 내 고립, 개인 간 고립, 실존적 고립이 있다고 합니다. 개인 내 고립은 자신이 자신의 부분으로부터 고립되어 있는 것입니다. 가령 바쁜 사람은 때로는 자신의 감정이나 욕구를 무시할 때가 있습니다. 생각과 몸은 당면한 과제로 바쁘지만, 감정과 욕구는 억압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당면 과제를 마치고서도 마음은 허전하게 마련입니다.
개인 간 고립은 상대가 공감하지 못하여 느끼는 외로움입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상대가 인사치레로 “다 잘될 것이야”라고 할 때 더더욱 홀로 힘들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실존적 고립은 이 세상에 홀로 와서 살다가 떠나야 하는 존재인 인간이기에 경험하는 근원적인 고립입니다. 아무리 공감을 잘 하는 따스한 사람이 주변에 많이 있다고 하더라도 나의 빈 마음을 채워줄 수 있는 완벽한 인간은 없습니다.
고립은 여러 가지를 시사합니다. 개인 내적 고립은 자신의 감정과 욕구를 온전히 인식하고 이를 수용할 것을 알려줍니다. 개인 간 고립을 피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공감할 사람을 찾아야 하고, 자신도 다른 이에게 공감해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실존적 고립은 고립에 대한 우리의 기대를 현실적인 수준으로 낮출 것을 요구합니다. 즉, 근원적인 고립감은 수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의미라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정신 없이 살다가도 문득 공허한 마음이 드는 것도 충분한 의미를 찾지 못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 세상은 그저 무의미한 세상처럼 보입니다. 따라서 실존주의 상담가들은 의미를 우리가 부여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요? 빅터 프랭클의 조언을 참고할 만합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자신의 삶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가 아니라 삶이 우리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것을 중단하고, 대신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해 매일 매시간마다 생각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인생이란 궁극적으로 이런 질문에 대한 올바른 해답을 찾고 개개인 앞에 놓여진 과제를 수행해 나가기 위한 책임을 떠맡는 것을 의미합니다.”
(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 2013.4.5 블로그 참조)
결국 의미라는 것은 구름 잡는 소리를 하는 게 아니라 현실의 구체적인 맥락에서 부단히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자유에는 책임이 따릅니다. 그래서 사실 우리는 자유가 좋지만은 않은지도 모릅니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지만, 그 결과는 불확실합니다. 그래서, 누군가 대신 선택해주고, 그가 책임을 떠맡아주었으면 하고 기대하는 마음이 은연중에 있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마음을 인식하고 단호히 선택의 자유를 행사하려고 할 때 우리는 시행착오를 경험할 수는 있겠지만 나날이 성장할 수 있습니다. 치마바람에 기대어 학창시절을 보낸 청년 중에는 기업에 들어가서도 어머니께 문의하면서 일을 하는 이가 있다고 하는데, 자유를 저버린 결과가 이것과 같이 의존적인 게 아닐까 싶습니다.
실존주의 상담가들은 의견을 간략히 살펴보았지만, 사실 여러분의 견해가 여러분의 삶에서는 가장 영향력이 있는 견해입니다. 따라서 위와 같은 논의를 단초 삼아 이 가을날 커피 한잔과 함께 깊은 사색에 잠겨 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어쩌면 가을 타는 마음도 가을볕에 말린 빨래처럼 가벼워짐을 느낄런지도 모를 일입니다.
* 참고서적 *
-보다 냉정하게 보다 용기있게 (어빈 D 얄롬)
-상담심리학의 이론과 실제 (노안영)
-현재 심리치료와 상담 이론 (권석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