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약 129년 전인 1896년, 스웨덴 화학자인 스반테 아레니우스(Svante Arrhenius)는 이산화탄소의 농도가 2배 상승하면 지구 온도는 5~6℃ 상승시킬 것이라고 예측했습니다. 생소했던 이상기후와 이산화탄소의 관련성을 처음으로 정량화하고, 지구 온도가 높아지는 현상을 온실에 비유하여 ‘온실가스(Green house gas)’라는 단어를 최초로 사용한 것도 그였습니다.
당시만 해도 지구 온도 상승은 식량생산 증가를 가져와 인류에게 축복이라 생각됐습니다. 온실효과가 재앙이 된다면 그 시기를 약 1000년 후로 예측했지만, 불과 100년 만에 지구는 온난화로 인한 기후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솔루션 위인전 3편의 주인공은 물리학과 물질의 변화를 연구하고 화학을 아우르는 물리화학의 개척자이자, 지구온난화를 처음 예측한 ‘스반테 아레니우스’입니다.
연산의 신동이 된 과학자의 출발점
1859년 웁살라 인근 마을 ‘비크’에서 태어난 아레니우스는 3살 때 독학으로 글을 배웠습니다. 또한 수학계산에 뚜렷한 관심을 갖게 되었고, 수학과 과학에 대한 호기심이 커진 그는 결국 연산의 신동이 되었습니다.
아레니우스는 수학적인 관계와 법칙을 알아내는 것을 즐겼으며, 이는 그가 나중에 물리학과 물질의 변화를 연구하는 화학을 보다 잘 이해하게 된 밑바탕이 되었습니다.
아레니우스의 '전리이론' : 혁신과 이단 사이
1876년 17세에 웁살라 대학에 합격해 물리학과 화학을 전공한 아레니우스는 1881년 학사 학위를 받고, 1884년에 ‘전해질의 전도에 관한 연구’라는 제목의 ‘전리이론(Electrolytic Dissociation Theory)’이라는 혁신적인 박사학위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이 논문은 염화나트륨(NaCL)이 물에 용해되면 나트륨 이온(Na⁺)과 염화이온(Cl⁻)으로 분해되어 전하를 띤 자유입자가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논문 심사를 받는 과정은 혁신적이지 않았습니다. 이온 상태의 입자가 원자나 분자일 때와 다른 성질을 갖는다는 사실이 당시에는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염화나트륨이 물에서 나트륨과 염소로 분해된다는 것 자체가 파격적이었기 때문에 당시 그의 논문은 심사위원들로부터 이단적인 주장으로 평가받아 낮은 4등급을 받게 됩니다.
아레니우스는 여기에 실망하지 않고, 논문의 내용을 복사해 가장 저명한 물리학자들에게 보냈습니다. 당시 물리화학의 세계적인 권위자인 독일의 물리화학자 ‘프레드릭 빌헬름 오스트발트(Friedrich Wilhelm Ostwald, 1909년 노벨화학상 수상)’는 아레니우스의 논문에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오스트발트는 직접 웁살라 대학을 방문해 그의 논문이 매우 우수하다고 역설하였으며, 아레니우스의 작업이 화학과 물리학 분야에서 중요한 기여를 할 것이라 믿었기에 그에게 공동연구와 직장을 제의했습니다. 그렇게 아레니우스의 논문과 연구 결과가 널리 알려지면서 인정받기 시작하였고, 그의 이론은 여러 과학적 논의에 인용되며 화학 및 물리화학 분야에서의 영향력이 확대되었습니다.
결국 웁살라 대학은 아레니우스의 연구가 학문적으로 중요한 기여를 하고 있다고 판단해 1885년에 그를 강사로 채용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 아레니우스는 학문적 커리어를 본격적으로 확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레니우스는 1886년에는 연구원의 자격을 얻어 1887년에 오스트발트와 함께 공동연구를 진행했습니다. 이 공동연구는 그의 연구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고국보다 해외에서 먼저 인정받은 인재
아레니우스는 1886년~1890년 기간 동안 기센 대학(Justus Liebig University Giessen)을 포함한 여러 유럽 대학에서 연구를 진행했습니다. 리가의 오스트발트, 뷔르츠부르크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콜라우슈, 그라츠의 루트비히 볼츠만, 암스테르담의 반트 호프 등 해외 유수의 대학에서 유명한 과학자들과 함께 연구하며 자신의 이론을 정비해 나갔습니다. 이후 1891년 독일 과학 아카데미의 해외 유학생으로 선발되었으며, 1896년까지 독일에서 연구하면서 학문적 기반을 넓혀갔습니다.
아레니우스의 논문이 고국인 스웨덴에서 이단적인 주장이라며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을 때, 이미 독일과 다른 유럽 국가에서는 큰 관심을 받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웁살라 대학에서 강사 및 교수로 재직하던 그는, 1895년 기센 대학에 교수로 초빙되어 이직하게 됩니다.
프로이센 과학 아카데미가 아레니우스에게 연구소를 설립해 주겠다고 제안하자,스웨덴에서는 아레니우스의 업적을 인정하여 그를 초대 소장으로 초빙한‘아레니우스 연구소’를 설립했습니다.아레니우스는 이곳에서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활발히 연구를 진행하며 화학과 물리화학 분야에 중요한 기여를 했습니다.이 연구소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으며,그의 연구가 계속해서 후학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기관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화학과 물리학의 경계를 허문 '아레니우스 식'
19세기 중반 이후 화학 분야의 발전으로 화학 반응 속도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습니다. 화학공정의 효율성과 최적화를 위해 화학 반응 속도에 대한 이해는 필수였습니다. 당시 여러 법칙들이 있었지만 온도 변화에 따른 반응 속도 변화를 체계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이론적 모델이 없었습니다.
아레니우스는 1889년 화학 반응 속도와 온도 사이의 관계를 수학적으로 규명한 ‘아레니우스 식’을 발표했는데, 이를 통해 화학 반응 속도에 영향을 미치는 다양한 요인들을 분석하고 예측할 수 있게 됐습니다.
반응 속도에 대한 예측이 가능해짐에 따라 화학공정의 조건 최적화 및 에너지 효율화가 가능해졌습니다. 화학 분야를 넘어 물리학, 생물학, 지구과학 등 다양한 분야에 활용됐으며 현재까지도 화학 및 관련 분야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온실효과로 지구온난화를 예측하다
아레니우스는 이산화탄소의 정량화를 통해 온실효과가 지구에 주는 영향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였고, 1896년 ‘지표면 온도에 대한 대기중의 탄산(이산화탄소)의 영향에 관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그는 지구를 하나의 거대한 온실이라고 생각했으며 그 온실을 따뜻하게 하는 온실가스와 특히 이산화탄소의 영향에 주목했습니다.
당시에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지만 온실효과와 지구의 상관관계를 최초로 밝힌 연구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25세라는 젊은 나이에 전리이론을 발표해 당시 세계적인 물리화학자 오스트발트를 놀라게 한 아레니우스. 만약 그가 논문 평가 4등급을 그대로 받아들였다면, 세계적인 물리화학자가 되지 못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도 끊임없이 도전하고, 세계 학계에 과감히 문을 두드려 자신을 알렸습니다.
그렇게 그는 세계적인 과학자들과 학계가 주목하는 인물이 되었고, 그의 혁신적인 연구와 용기는 후대 과학자들에게도 많은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아레니우스는 자신의 이론을 세상에 알리는 용기로 새로운 지평을 열었으며, 이 용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얼마나 큰 변화를 만들어 내는지 보여주었습니다. 그의 발자취는 앞으로도 많은 이들에게 도전과 성취의 가능성을 상기시켜 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