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지 여행이라는 기대감에 가슴이 두근거리기에는 30이라는 나이가 결코 가볍지 않았나 봅니다. 부재 기간 동안 진행될 업무 사항에는 문제가 없는지, 급하게 싸둔 짐에는 무엇인가 빠진 것이 없는지 등 온갖 현실 속의 불안감에 쫓기며 허둥지둥 인천공항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습니다. 23:55분 밤 비행기에 탑승한 저, 유사원은 터키 항공의 배려있는 서비스와 와인 한 잔에 비로소 여행에 집중해 볼 마음의 여유를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지나가는 세월 속에 무덤덤해진 마음은 좀처럼 들뜨지 않습니다. ‘혹시나 패키지 그룹 안에 혼자 여행 온 멋진 처자가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무너져버린 탓도 있겠지만, 유럽에 여행을 가고 있다는 것이 실감나지 않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기대 이상의 서비스를 보여준 터키 항공. 다양한 필수품이 담긴 유틸리티 패키지
터키 시간 새벽 5:00. 어스름한 공항 밖 창가로 터키의 아침 해가 어른거릴 즘에서야 조금씩 ‘내가 여행 중이구나’ 하는 느낌에 빠져들 수 있었습니다. 낯선 사람들, 이상한 말 소리, 그리고 냄새. 오감으로 느낄 수 있는 이런 어색함이야말로 여행의 시작을 알리는 최고의 알람이 되어주는가 봅니다.
첫 일정인 보스포러스 해협 크루즈 관광을 위해 이스탄불 시내로 접어든 것은 약 오전 7시 즈음이었습니다. 버스 창 밖으로 비치는 시내에 자리잡은 모스크는 ‘이 곳이 터키야!!’를 외치며 서서히 유사원의 마음을 흔들어놓았습니다. 그 와중에 눈을 사로잡은 것은 아침 출근을 위해 부산하게 움직이는 터키 사람들의 모습이었습니다. 모스크라는 이국적인 상징을 뒤로 하고 신호 대기를 하고 있는 그네들의 일상이, 전혀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총총히 발걸음을 옮기는 서울의 직장인들의 모습과 겹치며 묘한 동질감을 풍기고 있었거든요.
출근을 위해 부산히 움직이는 이스탄불 직장인들과 그들을 위해 대기중인 택시들
밝아오는 이스탄불의 아침
제법 쌀쌀한 새벽 공기를 마시며 가로지른 보스포러스 해협. (사실 정신 없이 여행에 임하게 된 덕에 일정에 보스포러스 해협 보트 투어가 있는 줄 모르고 있었답니다…) 여독과 시차에 눈을 거불거리던 유사원이 여행을 본격적으로 실감하게 된 것은 바로 이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 위에서였습니다. 동양과 서양, 현대와 역사가 어우러진 이국적인 풍경에 둘러싸여 물살을 가르는 그 느낌, 그리고 머리 속을 휘젓는 경쾌한 기타와 바이올린의 멜로디는 ‘네모난 모니터 속에 갇혀있던 몸과 마음을 강렬하게 열어 젖혔습니다.
보스포러스 해협을 품은 이스탄불의 정경
돌 마바흐체에 들어서며
사실 수많은 시각 매체에 노출된 현대인은 웬만한 화려함에는 쉽게 자극 받지 않습니다. 모니터나 스크린을 넘어서는 압도적인 자연 경관쯤이 아니고서야, 간접적으로 경험하는 시각적 디자인에는 익숙해질 만큼 익숙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미적 센스가 그다지 남다르지 않은 유사원은 사실 돌마바흐체 궁전에 큰 기대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화려하다 해봐야 그냥 박물관 구경하는 정도로, 옛 오스만 제국의 발자취나 역사적으로 짚어봐야겠다 라고 생각했었거든요. 또한 역사에 대해서 미리 빠삭하게 공부해온 여행이 아니었기에, 현대에 이르러 문란(?)한 의미로 퇴색해버린 ‘하렘’ (여성과 가족이 거주하는 아파트식 구역)에나 깊은 관심을 가지며 정원에 발을 들인 것입니다. (마치 낙화함을 견학하면서 ‘삼천 궁녀는 다들 예쁘게 생겼겠지’라며 실실거리는 수준인 것이죠.)
‘가득찬 정원’, 돌마바흐체의 풍경
그러나 돌마바흐체 궁전 돌아보는 약 2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가 아직도 아득합니다. 사진 촬영이 금지가 무색할 정도로, 사진을 찍어야겠다는 생각조차 들 여유가 없이 쏟아져 들어오는 숨막히는 문양과 장식들이 궁전 내부를 도는 내내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14톤의 금, 40톤의 은. 그 수치로는 와 닿지 않던 눈부신 시각 정보들이 정말 할말을 잃게 만들었습니다. 세계 최대의 샹들리에, 값을 헤아릴 수 없다는 수많은 카펫, 크리스탈 벽난로, 각 국에서 온 진기한 장식품들.. 밖에서 보면 그다지 나쁘지 않았을 유사원의 공항 패션(?)을 실로 거렁뱅이 행색으로 만들어버리는 장관이 이어졌습니다. 그나마 대중문화라는 평균에 수렴해가고 있는 현대에 비해 과거에 소수의 사람이 권력을 통해 누렸던 문화의 힘이 얼마나 놀라운 결과물을 낼 수 있는지가 새삼 강렬하게 다가온 것은 물론이고요.
‘가득찬 정원’, 돌마바흐체의 풍경
궁전 내부 투어를 마치고 온 관광객들을 맞이한 것은 새하얀 울타리(울타리라는 표현이 미안할 정도의 아름다운 건축물)너머로 넘실대는 보스포러스 해볍의 물결이었습니다. 어느덧 새벽을 넘어 봄 내음이 감도는 아침을 맞으며 창살 너머로 보이는 탁 트인 바다를 보는 기분이란.. 매일 이러한 정원을 거닐었을 과거의 그 누군가들이 부럽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결코 소박하지 않은 장소에서의 소박한 바람은 바로 그 자리에서 조금 더 머무는 것이었습니다. 오스만 제국의 마지막 왕자 오르한의 돌마바흐체의 마지막 5일을, 아주 아주 살짝 이나마 곁눈질할 수 있는 그러한 시간을요.
‘가득찬 정원’, 돌마바흐체의 풍경
21세기에도 종교 갈등으로 인한 분쟁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스탄불이라는 도시 역시 비극적인 역사가 주고받는 가운데 빚어진 슬픈 아름다움의 집약일지 모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이스탄불의 상징이 바로 성소피아 성당이지요. 비잔틴 건축물의 정수로서 너무도 잘 알려진 성소피아 성당은 역시나 아름다웠지만, 서두에서 풀어낸 이야기와 같은 생각에 유사원은 조금 씁쓸한 기분으로 성당을 돌아보았습니다. 이 곳에서 느낀 것은 결코 공존의 미학이 아닌, 뒤 덮인 석회 속으로 침잠하는 엇갈림의 불씨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런 감상적인 측면을 배제하고 볼 때 성소피아 사원은 정말 웅장하고 찬란합니다. 햇살이 저며오는 회랑에서 고개를 들고, 마주친 그 눈길 앞에서 레미제라블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용서를 빌어야 할 죄 하나쯤은 가지고 있으니까요. 그렇게 한결 가벼운 발걸음으로 성소피아 성당을 뒤로 할 수 있었습니다.
블루 모스크 (왼쪽), 성소피아 성당(오른쪽)
터키의 역사, 주요 관광지에 대한 정보 등을 뒤로하고 이번 터키여행을 위해 사전 조사한 것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쇼핑정보 입니다. (참고로 유사원은 아줌마 근성이 제법 있답니다..) 드디어 첫 날 마지막 일정으로 방문하게 된 터키 최대의 시장 그랜드 바자르를 앞두고 유사원은 잽싸게 메모해온 그랜드바자르 쇼핑 목록을 복기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쇼핑에 대한 기대와 달리 정작 일어난 사태는…
18개의 출입구와 4천개 이상의 상점들을 보유한 그랜드 바자르
그랜드 바자르는 한국의 동대문과 남대문을 뒤섞어 놓은듯한 느낌이었습니다. 빽빽하게 들어찬 온갖 상점들 (막상 파는 제품은 비슷비슷한), 실내임에도 담배와 홍차를 손에서 놓지 않는 상인들의 구수함(?)과 친근한 한국말로 ‘횽아~ 싸다 싸’ 라고 호객하는 집요함까지. 정작 사려고 했던 물품들은 제대로 보지 못한 채, 여기저기서 ‘광놤 수따일~’을 외치면서 말춤을 추며 따라오는 호객 꾼들을 피해 이 곳 저 곳 다니다 보니, 어느새 알 수 없는 어딘가로 새버리게 된 것입니다. 심지어는 관광객으로는 보이는 사람들도 보이지 않는 시장 한구석에서 당황한 채로 집합 시간이 임박해오자, 유사원은 패닉 상태에 빠지며 비행기에서 본 ‘테이큰2’의 잔상만이 머리 속에 그리게 됩니다. 이 사람 저 사람 잡고 영어를 해봐도 통하지 않고, 점점 날은 어두워져 가는 상황에서 식은땀을 흘리던 유사원. 결국 집합 시간이 한 시간이나 지나서야 온 길을 겨우 되돌아가서 우거지상을 한 가이드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동행하던 분들 한 분 한 분 에게 죄송하다 말씀 드리며 머리 속에 맴도는 한줄기 생각,, ‘그랜드 바자르나 동대문이나 외국인이 쇼핑할 곳은 아니구나,,’ 터키 여행을 준비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그랜드 바자르에서는 물건 살 생각 마시기 바랍니다. 바가지 쓰기도, 헤매기도 십상이며, 같은 물건 다른 관광지에서 훨씬 저렴하게 구입 가능하답니다. 흑흑..
화려한 문양의 카페트와 반짝이는 장신구들로 가득한 시장 풍경
집에서의 하루와 여행에서의 하루는 이리도 다른 것일까요. 이번 편에서 다룬 모든 내용을 하루 동안 겪었다는 것을, 스스로도 글로 옮기며 새삼 놀라게 됩니다. 다음 편에서는 유사원이 터키 여행 동안 가장 즐거웠던 기억이 담긴 이즈밀에서의 에피소드, 그리고 에페소 관광의 이야기를 전해드리겠습니다. ‘터키탕 체험’ 과도 같은 흥미로운 이야기로 가득 채워보려 하니 아무쪼록 즐겁게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여행 1일차, 처음으로 제대로 접한 터키 음식. 잊을 수 없는 터키의 빵과 오렌지 맛은 터키가 그야말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사실을 실감나게 전해주었습니다.